<대한데일리=이병화 시민기자> 김훈은 주어와 동사를 활용해 문장을 구성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김훈은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의미를 모르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고도 답했다. 그래서인지 짧은 문장으로 구성된 김훈의 소설은 읽기가 쉽다. 단순하고 올곧은 문장을 지닌 김훈의 작품 중 부부관계를 다룬 ‘화장’과 ‘강산무진’을 살펴 보게 되었다. 

화장과 강산무진은 읽는 이에 따라 지루할 수 있다. 둘 다 부부관계의 지속성과 연결성을 다루고 있으며, 주변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부부관계의 유형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 작품이 매력적인 것은 김훈의 언어를 통해 부부가 사랑하는 행위의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어서다. 

김훈은 부부관계에 있어서의 마땅히 할 도리와 복잡한 감정들에 대해 작품 중 인물인 '나'를 중심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장에서 '나'는 투병하는 배우자의 생과 사의 과정에 늘 함께 존재하고 있고 강산무진에서 '나'는 비록 아내와 이혼하지만, 이혼한 아내와의 관계를 긍정하게 된다.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복귀하며 사랑의 중용을 이루는 ‘나’

화장에서 한 기업의 상무로 등장하는 '나'는 같은 회사 기획과 여직원 추은주를 흠모한다. 작품의 '나'는 배우자와 딸, 사위가 있는 사람이다. '나'의 아내는 뇌종양으로 투병 중이다.

'나'는 아내 병수발을 하며 기획과 여직원을 마음 속으로 그린다. 외형적으로는 아내의 병을 간호하고 있지만 속마음은 추은주를 생각하고 있다.

결국 '나'의 아내는 투병하다 사망하게 되고 사망 순간까지 '나'는 모든 과정을 지켜본다. '나'의 아내의 화장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항상 '나'가 있다.

“심전도 계기판의 눈금이 0으로 떨어지자 램프에 빨간 불이 깜박거리면서 삐삐 소리를 냈다…옆 침대의 환자가 얼굴을 찡그리면서 저편으로 돌아누웠다.”(화장, p.33, 문학동네)

'나'는 배우자와 자식이 있는 기획과 여직원 추은주를 사모하지만 추은주의 사표를 수리한다. 시종일관 작품에 등장하는 '나'는 배우자의 투병과 사망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고 객관적 태도를 잃지 않는다.

"…나는 아내의 고통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아내의 고통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고통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화장, p.46, 문학동네)

"생명현상은 그 개별적 생명체 내부의 현상이다. 생명은 뒤섞이지 않는다. 생명에서 생명으로 건너갈 수 없고, 이 건너갈 수 없음은 생명현상이다."(화장, p.46~47, 문학동네)

'나'와 아내는 이렇듯 서로에 대한 감정을 나타낼 뿐이다. 이로써 '나'는 아내에 대한 객관적 시선을 향하게 된다.

배우자의 앙상한 몸을 보고 씻겨주며 배우자는 시각도 온전하지 못한 상태가 되는데도 ‘나’는 눈물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딸은 모친의 상태를 듣고 슬퍼하지만 모친이 투병하는 상황에는 직접적으로 간호에 참여하지 않는다.

'나'는 투병하는 배우자를 간호하는 동시에 기획과 여직원 추은주를 떠올리는데 추은주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라면 투병하는 배우자에 대한 '나'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그 감정은 일종의 가벼운 의무감이었을 것이다. 작품 중 간병인이 간병의 의무를 전적으로 지고 '나'는 보조적 역할만 수행한다.

마지막에는 배우자가 지어준 보리라는 강아지도 키울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나'는 추은주의 사표도 다소 냉소적으로 처리해버린다. 배우자의 죽음을 맞이한 이후의 '나'는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추은주에 대해서도 냉소적으로 변하게 된 것일까. 화장은 추은주에 대한 따뜻한 감정이 배우자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식어버리는 과정을 잘 그려냈다.

결국 화장에서의 부부관계를 보면 '나'는 다소 형식적 간호로 배우자를 간호하는 동시에 여직원 추은주를 흠모했지만 끝까지 배우자의 생사의 순간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나'는 아내와의 의리를 지켜냈고 '나'는 추은주에 대한 인사처리도 차갑게 해내며 다소 흔들렸던 감정도 아내의 죽음을 경험하며 성숙해 흔들리지 않는 중용을 유지하고 있다.

일관되게 사랑을 배반하지 않는 ‘나’와 ‘나’를 사랑하는 전처가 이뤄내는 사랑의 중용

김훈의 또 다른 작품인 강산무진에서 '나'는 지렁이를 봐도 놀라는 배우자와 이혼한다. '나'의 딸은 '나'와 배우자의 사이에서 소통을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암으로 투병 중인 '나'는 미국에 있는 아들의 말에 따라 미국의 요양 시설로 향하게 되고 교회의 전도사와 재혼한 '나'의 아내는 미국으로 떠나는 '나'를 공항에서 배웅한다. 재혼한 배우자와 함께 '나'를 배웅하러 공항까지 나오는 '나'의 아내는 정서상 다소 괴리가 있다. 이혼한 후 다른 남자와 재혼한 아내가 작품의 '나'를 위안하는 것도 일반적 관념 상 거리가 있다.

그러나 강산무진의 '나'와 배우자는 사랑에 일관성이 있다. 염려가 사랑이라면 '나'의 배우자는 '나'를 기도행위로써 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부로서 몸은 떨어졌어도 기도하며 정신적으로는 사랑을 표현하고 있고 이혼한 '나'도 다른 여자와 재혼하지 않음으로써 배우자에 대한 사랑을 배반하지 않는다.

"…'전처'가 내포하는 인연의 고리가 '현처'보다 가벼운 것도 아니지 싶었지만, 잘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기야 아내에서 타인으로 돌아가는 과정의 온갖 우여곡절을 인연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었다."(강산무진, p. 330, 문학동네)

'나'는 비록 아내와 이혼 후 이 아내가 재혼한 후라도 아내(전처)와의 인연을 버리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아내와 함께 결혼 후 영위했던 시간들과 자신과 이혼 후 재혼한 아내가 자신에 대해 사랑(염려)을 표현하는 현 시간들을 함께 긍정하며 삶에 대한 낙천적인 태도를 보인다.

"맞은편에서 달려와서 스쳐 지나가는 기차처럼 시간이 두 갈래의 방향으로 흘러서, 앞쪽으로 달리는 시간의 기차와 반대쪽으로 또 다른 시간의 대열이 내 몸을 싣고 거꾸로 달리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강산무진, p.336, 문학동네)

강산무진에서의 부부관계를 보면 '나'는 형식적으로 아내와 이혼하고 배우자는 재혼하며 '나'를 배반하는 듯 보이지만 배우자는 '나'(김창수)에 대한 염려를 거두지 않음으로써 사랑을 표현하고 있어 '나'와 배우자는 사랑에 대한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주여, 길 잃은 어린 양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불쌍한 김창수의 죄를 사하여주시고 그의 앞길을 인도하소서.”(강산무진, p. 351, 문학동네)

이처럼 김훈의 화장과 강산무진에서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부부관계에서의 치우치지 않는 중용을 잃지 않고 있다. 비록 화장에서 '나'는 몸이 아픈 아내를 떠나 여직원을 사랑하지만 종결 부분에서 그 여직원에 대한 냉소적 태도를 보임으로써 다시 아내와의 관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여기서의 아내는 사별한 후지만 '나'는 아내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인 도리를 하고 있기는 하다.

그리고 강산무진에서 '나'는 아내와 이혼 후 이 아내가 재혼하지만 아내와 이혼한 후의 시간들을 품어 안음으로써 배우자에 대한 신뢰와 안정성을 획득하고 있다.

이 부부관계의 중용(안정성)에서는 재혼한 배우자가 '나'를 염려함으로써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고 이러한 전처의 행동이 '나'와 배우자의 부부관계를 안정화시켜 중용에 이르게 한다.

현실에서 통계청의 인구동향조사 결과를 보면 1년에 약 26만건 정도의 혼인과 약 11만건 정도의 이혼이 이뤄진다. 또한 2019사법연감을 보면 무자녀보다 자녀가 1명이라도 있으면 이혼율은 가파르게 떨어지고 서비스 및 판매 종사자의 비율이 20~25% 정도 차지하는 현실을 알 수 있다. 이혼 사유를 보면 성격차이가 40% 이상, 기타 사유도 약 30% 정도를 차지함을 알 수 있다. '강산무진'에서의 부부는 자녀가 있는데도 이혼한 사례로서 이혼사유는 기타사유일 가능성이 높다.

김훈의 이 두 작품은 부부가 사랑하는 또는 삶을 살아가는 두 유형을 잘 그려냈고 부부관계의 굳건한 중용상태를 긍정함으로써 이는 김훈의 작품세계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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