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고 길다란 슬로우보트들.
좁고 길다란 슬로우보트들.

<대한데일리=오은희 시민기자> 얼마 전 카카오톡 친구 생일 알림 목록에 낯선 이름(A)이 떴다. A의 프로필 사진은 분명 낯이 익은데 어디서 알게 된 누구인지까지 생각이 좀처럼 나질 않았다.

‘아! 맞다. 루앙프라방!’

밤 11시 30분. 그 낯설고도 익숙한 이의 생일을 30여분 남겨두고 A에게 카톡을 보냈다.

-안녕 잘 지내? 나 오은희인데 기억나? 그때 그 라오스에서 만났던…

그 메시지를 시작으로 몇 해 전 라오스에서의 여행이 떠올랐다.

A와 나는 태국 작은 도시 빠이(Pai)의 한 길거리에서 만났다. A는 자전거를 렌트해 타고 있는 내게 자전거를 어디서 빌렸냐고 물었고 난 자전거 대여소를 알려준 뒤 가벼운 묵례를 나누고 헤어졌다.

하지만 작은 도시 빠이에선 몇 안 되는 한국인인 A무리와 나는 자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 다니는 내가 쓸쓸해 보였는지 A와 무리들은 함께 밥을 먹자고 했다. 그들이 발견했다는 팟타이 맛집으로 향했다. 밥을 먹으며 A는 나에게 다음 행선지는 어디냐고 물었다.

루앙프라방 메콩강가에서의 해질녘 풍경.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루앙프라방 메콩강가에서의 해질녘 풍경.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라오스로 가려고요. 루앙프라방이요.”

A는 나와 똑같이 루앙프라방(Luang Prabang)에 간다고 했다. A무리의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방비엥(Vang Vieng)으로 간다고 했기에 나와 일정이 겹치는 사람은 A밖에 없었다. 루앙프라방에는 어떻게 갈 거냐 묻는 A에게 슬로우 보트(Slow boat)를 탄다고 했다. 주머니가 가벼운 탓에 숙식과 이동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슬로우 보트가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슬로우 보트는 말 그대로 느린 배다. 2박 3일의 여정 동안 메콩강 위를 운항하며 태국과 라오스의 국경을 통과하는 여정이다. A와 나는 늦은 밤 빠이에서 버스를 타고 태국 북부도시 치앙콩(chiang khong)의 한 선착장에 도착했다. 선착장 옆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라오스 국경인 훼이싸이(Huay Xay)로 넘어가기 위해 작은 보트를 탔다. 치앙콩에서 훼이싸이로 넘어가는데는 보트로 5분이 채 안 걸렸다.

훼이싸이에서 간단히 입국절차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슬로우보트에 탑승했다. 뚜두뚜두 굉음을 내는 모터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A와 나는 많은 얘기를 나눴다. 한국에서 뭘 하고 있는지, 꿈이 뭔지 등 뭐 그런 웅장하지만 시시꼴랑한 얘기들. 슬로우 보트에 함께 탔던 외국인들과도 친해져 여러 얘기를 나눴다. 1년 동안 세계 일주를 하는 이탈리아 친구, 엄마와 이혼해 자주 보지 못하는 아빠와 함께 동남아 여행을 떠나온 프랑스 친구. 그들이 가진 사연들도 다 하나하나 특별했다. 대화도 지칠 때쯤 우리는 빙고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인들이 모두 숫자 외침 소리 하나에 환호했고, 절규했다. 슬로우보트 여정 자체가 큰 여행이자 즐거움이었다.

메콩강을 건너는 동안 슬로우보트는 라오스의 몇몇 섬마을에 들어 사람들과 짐을 실어 날랐다. 이 슬로우보트가 라오스의 택배사 혹은 고속버스인 셈이었다. 보트에 올라타는 라오스 사람들은 태국에서 만났던 사람들과는 또 다른 느낌의 맑은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몇 곳의 섬마을을 더 들린 후에 우리는 어느새 루앙프라방에 도착했다. 고단한 여정을 끝내서인지 루앙프라방의 하늘은 더 높고 아름다워 보였다.

A, 그리고 보트에서 친해진 친구들과 다시 볼 것을 약속하고, 본격적인 루앙프라방 탐방에 나섰다.

루앙프랑방에는 맛있는 빵집들이 참 많다.
루앙프라방에는 맛있는 빵집들이 참 많다.

라오스는 프랑스 식민 지배의 영향을 받아 동서양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실제 라오스 건물 대부분은 유럽풍의 고풍스러운 양식으로 지어졌고, 빵 문화 역시 매우 발달돼 있다. 루앙프라방 곳곳에는 엄청난 향기를 뿜어내는 유명 베이커리들이 많았다. 빵 중에서도 독특한 것은 ‘반미(Ban Mi)’라는 라오스식 바게트 샌드위치다. 바게트 속에 야채나 고기가 듬뿍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바게트 샌드위치와 같지만 반미에는 ‘고수’가 추가돼 특별한 샌드위치로 변신한다.

고수를 싫어한다면 주문할 때 ‘마이 싸이 빡치(고수를 빼주세요)’를 외쳐야 하지만, 라오스에 왔으니 고수 듬뿍 담은 반미를 맛보길 추천한다.

루앙프라방은 밤에 또 한 번 피어난다. 해가 지면 메인스트리트에 차량을 통제시키고 나이트마켓을 개장하는 것이다. 나이트마켓에는 고산족이 직접 수제로 만든 액세서리들과 기념품숍이 즐비하게 늘어서 여행자들의 눈과 지갑을 사로잡는다.

라오스의 새벽을 여는 탁발행렬.
라오스의 새벽을 여는 탁발행렬.

루앙프라방 여행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이른 새벽이다. 매일 새벽 어린 동자승에서부터 나이 지긋한 노스님까지 줄지어 음식을 적선받는다. 주황색 승복을 차려입은 이들의 탁발 행렬을 바라보고 있자면 신앙심 없이도 경건해지는 기분이었다.

카카오톡 생일 알람 덕분에 루앙프라방을 다시 찬찬히 여행해 봤다. 괜히 콧등이 시큰해진다.

취준생과 대학생이던 A와 나는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고, 돈보다 시간이 없는 우리는 이제 슬로우보트를 타고 루앙프라방으로 향하긴 어려워졌다. 그때 슬로우보트를 함께 나누어 탔던 사람들이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도 나처럼 이렇게 우연히 기억 속 루앙프라방을 마주했을때 가슴에 작은 행복이 피어날 것이라 믿는다.

*슬로우보트(Slow Boat) : 태국에서 라오스의 국경을 넘어가는데 이용되는 교통수단. 여비가 넉넉지 않은 여행자들에게 인기를 끈다.

*탁발 : 이른 아침 스님 혹은 수행자들이 절 주변을 돌며 신도들로부터 음식물을 받는 불교 의식 중 하나다. 걸식을 통해 얻은 음식을 담은 발우에 목숨을 기탁한다는 의미도 있으며, 탁발을 통해 아만과 고집을 없애고 무욕과 무소유를 실천하는 스님들의 수행법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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