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데일리=고경은 시민기자> 사랑에 빠져본 적 있는가? 그 순간을 기억하는가?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친 순간, 다른 모든 게 정지하고 세상에 오직 그의 눈과 내 눈만 남아 오래도록 시선을 맞춰 본 적 있는가. 사랑이 다해갔을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더 이상 날 보지 않는 상대를 보며 슬퍼해본 적이 있다면, 시선의 맞춤이 곧 사랑의 본질이라는 말을 잘 알 것이다.

시선은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고 사랑하는 두 존재를 구속시킨다. 사랑은 ‘시선’과 ‘폐쇄성’을 통해 완성된다. 단 둘만 있는 장소에서 서로를 향하는 집요한 시선, 여기서 장작처럼 타오르며 완성되는 ‘닫힌’ 사랑의 이야기가 있다. 제72회 칸영화제에서 각본상과 퀴어종려상을 받은, 셀린 샴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다.

시선으로 역전된 그들의 관계, 사랑의 눈 맞춤
18세기 말, 화가 마리안느는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백작가의 딸,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려줄 것을 의뢰 받고 작은 섬으로 가게 된다. 결혼을 원치 않기에 엘로이즈는 초상화를 그리는 것 역시 거부하였고, 때문에 마리안느는 몰래 그녀를 훔쳐보며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초상화를 완성하기 위해 엘로이즈의 모든 것을 눈에 담아야 했던 화가와 그런 그녀의 시선을 느낄 수밖에 없는 모델, 이 둘은 어느새 사랑에 빠지게 된다.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알아채고 엘로이즈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때 한 말이 있다.

‘당신이 나를 바라볼 때, 나는 누구를 바라보겠어요.’

둘의 관계는 화가와 모델이다. 일반적으로 화가는 모델을 눈으로 좇고 모델은 시선 끝으로 내몰린다. 그러나 모델인 엘로이즈가 마찬가지로 화가를 응시하면서 둘의 관계는 변화한다. 들의 첫 만남에서, 마리안느의 시선이 바쁘게 엘로이즈를 좇는 것이 나온다. 그녀의 눈에 비친 엘로이즈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나오고, 이어서 그녀가 잠시 고개를 돌릴 때 엘로이즈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미디엄 샷으로 등장한다. 앞으로의 시선 관계가 일방적이지만은 않을 거란 암시를 주는 부분이다. 이들에게 시선은 평범한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를 넘어서 더 특별한 관계를 만드는 수단이자 도구인 것이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약혼자’는 엘로이즈에게 어떤 시선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그녀를 집에 들어앉힐 초상화만을 요구할 뿐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처음 신혼집에 와 자신을 맞이한 것은 본인의 초상화였다 말한다. 여기서 초상화는 여성을 소유하려는 가부장적 시선을 상징한다.) 둘의 사랑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이에게 엘로이즈를 귀속시키는 수단이 될 초상화를 그리며 깊어진다. 엘로이즈는 결혼을 거부하며 ‘얼굴도 본 적 없는’을 강조한다. 만약, 약혼자와 대면을 하고, 그와 눈 맞춤을 한 번이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두 여인의 사랑이 시작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시선은 바로 사랑의 시작이자 이 영화의 시작이었다.

불을 붙이는 시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이 영화의 중반, 배경음악도 없이 장작 타는 소리만 꾸준히 들리던 고요한 영화가 장작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는 장면이 있다. 처음으로 영화에 ‘bgm’ 같은 것이 등장하는 순간이며, 감히 글로 묘사도 못할 만큼 압도적인 광경이다.

축제가 무르익은 밤, 마을 여성들이 모닥불로 모여들어 노래를 하는 순간,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두 주인공은 서로를 바라본다. 시선을 마리안느에게 고정한 채 걷던 엘로이즈의 치맛자락에 불이 붙는다. 진한 응시는 사랑의 불을 붙여버렸고 그 속에서 둘은 불이 붙은 사실조차 모른다. 시선의 끝에서 사랑은 밝은 빛을 내며 타오르고, 둘만의 시공간을 초월한 듯한 그 순간은 마을 여성들이 불을 끄기 위해 달려들기 전까지 계속 된다. 그러나 시선만은 여전히 서로에게 고정돼있다.

그 다음, 화면은 바로 밤에서 낮으로, 마을에서 외딴 바닷가로 이동한다. 장면을 이어주는 화면(컷 어웨이) 없이 바로 전혀 다른 컷으로 넘어가는 점프 컷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영화는 두 여인이 사랑에 불이 붙은 시점에서 외부의 침입이 없는 단절된, 둘만의 공간으로 점프하는 것을 보여준다. 거기서 두 사람은 천으로 눈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휘감고 나온다. 한 단계 더 발전한 농밀한 응시 속에서 둘은 동굴에 도착하고 이내 키스를 나눈다.

배경과 연출에서 나오는 폐쇄성
사랑은 시선에서 만들어지고,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가두는 폐쇄성에서 완성된다. 본 영화는 다양한 연출을 통해 두 인물을 끊임없이 폐쇄적인 공간 속으로 밀어 넣는다.

영화는 현재-과거-현재의 액자식 구조를 갖고 있다. 영화의 맨 처음, 바깥이야기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마리안느는 도시의 한 미술교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 공간은 탁 트여 있다. 그곳에서 이내 작은 배를 타고 백작가로 향하는 마리안느는 바다에 빠진 캔버스를 건지려 바다에 뛰어든다.

화면의 편집은 다시 한 번, ‘이동의 중간 지점’없이 점프한다. 바다에 뛰어든 후와, 배에서 건져지는 장면 없이, 담요를 덮고 떨고 있는 모습을 바로 붙인 것이다. 여기서 마리안느는 이전의 세계와 한번 단절된다. 영화에서 ‘바다’는 파란 드레스를 입고 등장하는 엘로이즈를 상징하기도 하는데, 여주인공이 엘로이즈와의 세계에 돌입했음을 제의적으로 보여준다. 내부이야기가 이렇게 시작됐다. 이제 영화의 시선은 도시의 공간성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좁은 공간으로 파고든다.

배에서 내린 마리안느는 해변가를 거쳐 백작가에 이른다. 백작가의 전경이 나올 법하지만 영화는 곧바로 현관문을 비추고, 이어서 하녀 소피가 등장하도록 만든다. 마리안느는 계속해서 좁은 공간으로 이동한다. 좁은 배에서, 이전세계와 한 번의 단절을 겪고, 좁은 문을 통해 그녀는 좁은 부엌으로 간다. 그녀의 방 역시, 엘로이즈에게 초상화 작업을 들켜선 안 되므로 작업공간이 흰 천으로 가려져 있다. 흰 천 뒤에서 작업을 하고, 엘로이즈가 방에 찾아 왔을 땐 방의 반절에서 그녀를 맞이한다. 둘이 있는 공간은 늘 이렇게 좁고, 막혀있으며, 더 높은 밀도와 긴장을 조성한다. 심지어 해변 산책에서는 사방이 거칠거칠한 돌로 막혀 있는 곳을 걷는다. 그렇다면 탁 트인 바다의 풍경은 폐쇄성에 반하는 것일까? 바다는 도리어 외부와의 단절을 가능하게 한다. 이르자면, ‘벽과 담’이다. 축제의 캠프파이어가 이뤄지는 곳 역시 사방이 무릎까지 오는 풀로 둘러싸여 있다. 관객은 끝까지 저택의 외관을 모른다.

그 집이 마을 어디에 위치하는지도 알 수 없다. 두 주인공의 공간이 전체의 위치에서 어디쯤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곳은 연인간의 은밀한 공간이어야 하기 때문에 카메라는 인물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둘의 시선이 닿는 폐쇄적인 공간만 그린다. 마리안느가 도착한 그 섬, 그곳의 백작 저택은 말하자면, 현실에서 유리된 환상적인 공간이다.

빛이 공간을 축소시키는 방법
이 영화에서 시종일관 등장하는 타오르는 불빛은 번져가는 사랑의 은유이다. ‘불’은 사랑의 은유로써 멋진 회화적 장면들을 연출해낸다. 그리고 동시에 좁은 공간만을 조명함으로써 인물들의 공간을 축소시킨다. 형광등은 공간 전체를 밝히지만 ‘불’은 제한된 공간만을 비춘다. 후일에 밀라노 전시장에서 결혼 이후 엘로이즈를 그린 그림을 발견한 마리안느는 전체를 밝게 비추는 전기 조명 아래 있다. 주변은 사람들로 가득하고 소란스럽다. 대체로 영화의 바깥이야기에서는 환하고 탁 트인 공간성이 조명되고, 사랑을 나누던 ‘내부이야기’에서는 어둡고 폐쇄적인 공간성이 부각된다.

의상에서조차 제한된 빛을 사용해서 공간의 축소를 꾀한다. 두 주인공이 입는 빨간색, 파란색 드레스 역시 낮은 채도와 명도를 가졌다. 그러나 엘로이즈와 달콤한 시간을 보내던 마리안느가 어두운 복도에서 마주하는 ‘환영’은 전혀 다른 질감이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환영은 아주 환한 빛으로 등장한다. 공간을 밝히는 빛은 두 여인의 내밀한 세계를 위협한다. 그것은 ‘환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둘만의 내밀한 세계에 다가오는 ‘현실’이다.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로 오르페우스 신화가 등장한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지하세계에서 데리고 나오던 중 금기를 어기고 뒤를 돌아봐 그녀를 영영 잃게 된 오르페우스. 그의 이야기는 시선의 맞춤과 폐쇄성의 금기가 깨질 때 연인을 잃게 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영화가 조명하는 사랑의 본질을 담아냈다. ‘뒤돌아보지 말 것’이란 금기는 사실 ‘시선의 부재’가 전제된 금기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시선을 거둔 채 ‘어둠’을 지나 지상의 ‘환한 빛’에 도달한다면 사랑 역시 끝나 있을 거란 암시다. ‘사랑’하는 아내를 지키고 싶다면 ‘사랑’을 포기하라는 명령이다. 이 맥락을 이해한 등장인물들은 오르페우스 신화를 금기를 어긴 ‘과실(過失)’로 보지 않는다. 당사자들이 사랑을 위해 한 ‘선택’이라고 본다. 운명에 대항해서 함께할 순간을 억지로 만들어나가는 것은 언젠가 후회를 불러올 것이다. 계절의 역풍을 맞고 꽃이 시들 듯 사랑도 시들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함께한 순간을 영원히 기억함으로써 사랑을 영속시키는 것을 택했다. 사랑을 포기함으로써 사랑을 영속시킨다는 아이러니함이 가슴을 울리는 대목이다. 엘로이즈 역시 이별을 앞두고 마리안느에게 말한다.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

그들의 사랑은 여전히 좁은 공간 안에서 은밀히 서로를 향하고 있다
그렇게 내부이야기가 끝난다. 출타 중이던 어머니가 돌아오고, 초상화도 완성되고 각자의 사정으로 두 사람은 섬을 떠나게 된다. 외부세계와는 단절된 둘만의 공간을 떠남으로써 둘의 사랑은 끝난다. 그러나 그들에겐 서로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 있다. 마리안느에겐 엘로이즈의 치맛자락이 불타던 순간이 영원히 남아있고 엘로이즈에겐 책의 28p에 그려진 마리안의 자화상이 있다. 시든 꽃을 보며 자수에 활짝 핀 꽃을 수놓던 소피의 모습처럼, 시간이 흘러 모든 게 변해도 그림이라는 작은 세상 속에 박제시킨 사랑은 언제나 환하게 불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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