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데일리=고경은 시민기자> 우리의 삶에서 늙음을, 세월이 흘렀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은 늘 갑작스럽다. 어느 날 쳐다본 거울 속에서 늙은 내 얼굴을 마주할 때, 오랜만에 찾아간 옛 동네에서 새롭게 그 자리를 채운 젊은 사람들을 볼 때. 나는 아직 젊은 것 같은데,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생기보단 원숙이란 단어에 더 가까워진 나를 발견하게 된다.

흘러가는 시간을 눈치챘으나,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느낄 때는 또 얼마나 절망적인가. ‘젊음’을 질투하는 내 모습에 진절머리가 난다.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우리는 시시각각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인생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늘 안개구름에 휩싸인 것처럼 막연하고 혼란스럽다. 오늘 소개할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 역시, 젊음을 가슴에 품고 늙어가는 배우 마리아를 통해,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 그 사이 어디쯤에서 우왕좌왕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젊음을 가슴에 품고 늙어가다
젊은 시절 ‘말로야 스네이크’라는 연극에서 시그리드 역을 맡아 무명 배우에서 일약 스타로 오르게 된 배우 마리아는 어느새 중후한 느낌을 풍기는 중년 배우가 되었다. 그녀는 급격하게 변해가는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낸다. 매니저 발렌틴에게 여러 이야기를 전해 듣지만 그때마다 ‘인터넷이니 가십이니’ 하는 세상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아니라고 답할 뿐이다. 블루스크린 앞에서 엑스맨 같은 영화를 촬영하는 것도 지쳤다고 한다. 명성 있는 배우로서 자신만의 신념을 품은 것처럼도 보이지만 한편으론 늙은 사람의 완고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세상에 대해 방어적인 자세만을 취하고 사는 건 아니다. 맞지 않는 배우자와의 결혼 생활을 결단력 있게 청산하고, 사랑하는 감독의 죽음에는 한 없이 슬퍼하며, 불의한 것에 분노하기도 한다. 그녀의 안엔 아직 젊음과 어울리는 충동적인 마음과 생기, 솔직함이 있지만 그녀는 늙었고 그녀 주변엔 죄다 젊은 사람들뿐이다. 젊고 능력 있는 매니저, 젊은 나이에 필모가 꽤 좋은 감독, 할리우드의 대표 문제아로 불리는 젊은 여배우, 이들 가운데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들의 ‘젊은 패기’와 자신의 삶의 방식을 비교하게 된다. 한편으론 매니저 발렌틴과 남자 친구의 모습을 훔쳐보며 탐닉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자신만의 방어적인 자세로 외면하기도 하면서 그녀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젊음의 상징 시그리드, 중년의 헬레나가 되다
그렇게 충동과 원숙함 사이에서 헤매는 마리아의 모습은 그녀가 18살 때 연기했던 ‘말로야 스네이크’의 리메이크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면서 극대화된다. 본 연극은 야망에 찬 젊은 여인 시그리드가 연상의 상사인 헬레나를 유혹해 자살로 몰고 가는 내용이다. 마리아는 자신을 세계적인 배우로 만들어준 시그리드 역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었다. 그녀에게 시그리드는 젊은 날의 영광 그 자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이 든 마리아에게 찾아온 역할은 그녀가 그토록 혐오하던 ‘헬레나’ 역이었다. 마리아는 헬레나를 젊은 시그리드에 대한 열등감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지리멸렬하고 진부한 캐릭터라 평한다. 그 역을 맡았던 배우 역시 헬레나 역을 맡고 난 뒤 얼마 안 돼 죽어버리고 만다. 마리아는 그녀를 회상하며 젊은 시절 자신의 연기를 질투하던 그녀가 자살한 것일 거라 추측한다. 마리아 역시 헬레나를 연기하며 그렇게 돼버릴지도 모른단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감독이나 그녀의 매니저 눈에 헬레나는 결코 그런 캐릭터가 아니다. 파멸할 줄 알면서도 뛰어드는 진실하고 순수한 캐릭터이며, 이런 점에서 충동적일 수 있지만 연륜에서 나오는 원숙함이 있다. 마리아는 시그리드와 헬레나를 아예 성정이 다른 사람으로 평가하나, 주변은 헬레나가 시그리드의 20년 뒤의 모습이며, 그래서 더욱 시그리드를 연기했던 마리아가 헬레나의 역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매니저 발렌틴과 대사 연습을 하며 헬레나의 무기력하고 상투적이고 진부한 내면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연기해야 한다는 게 그녀를 계속 괴롭힌다. 이윽고 젊음의 대변인과 같은 존재로 등장하는 발렌틴과 갈등에 이르기까지 한다. 그녀는 헬레나도 시그리드도 될 수 없으며 과거에 갇혀 있으면서도 젊음을 완전히 수용해내지 못하는 늙은 자신의 모습에 좌절한다.

실스 마리아의 구름, 말로야 스네이크
실스 마리아에 머물면서 대사 연습을 하며 갈등을 반복하던 와중, 마리아와 발렌틴은 실스 마리아의 유명한 구름, 말로야 스네이크를 보러 산에 오른다. 등산 과정에서 갈등을 반복하다 결국 발렌틴은 마리아를 두고 산을 내려가 버린다. 고개를 굽이 돌며 구름은 몰려오는데, 결국 둘은 그 장관을 보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 내려오게 된다. 후에 발렌틴은 산을 내려오며 말로야 스네이크로 추정되는 안개구름에 휩싸이게 된다. 그녀는 매스꺼워하며 토하고 구름에 갇혀 사방이 차단된 시야에 혼란스러워한다. 발렌틴은 구름의 한 가운데서 혼란스러워한다. 멀리서 보면 장관이지만 그 현장에선 한 없이 매스껍고 뭐가 뭔지 분간해 내지 못하는 게 꼭 우리네 삶 같아 보인다.

극 중 발렌틴은 젊음의 대변인이다. 그녀가 구름 한가운데서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젊음은 열정과 생기를 갖고 있지만 한편으론 사건의 한가운데에서 늘 혼란과 방황을 겪는다는 것을 표현한다. 젊다는 것은 앞뒤 분간 없이 몰입한다는 것, 그래서 치기 어릴 수 있고 생기 넘치는 것이다. 영화 속 장면에서 나오진 않았지만, 구름 낀 산을 내려오면서 마리아 역시 안개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나온 장면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마리아의 모습이다. 늙음이라는 것은 현장의 한가운데를 헤치고 나와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관조한다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인생이라는 긴 시간을 딱 반으로 잘라, 초반부는 젊음, 후반부는 늙음으로만 명명하는 것은 아니다. 마리아가 드디어 연극 리허설을 시작하며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보자.

주변으로 밀려나도
시간이 흐르고, 연극 리허설 일이 다가왔다. 발렌틴은 떠나고 새로운 매니저가 그녀 곁에 있다. 새 매니저는 그녀에게 인공지능 SF물 제안이 들어왔다 전한다. 전의 마리아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감독과 이야기해보기로 한다. 대사 연습을 하던 때의 복잡한 표정과는 달리 그녀는 좀 더 초연하고 관조적인 자세가 되어있다. 사건의 한가운데를 지나왔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SF물을 제안하는 감독은 마리아에게 ‘시간을 초월한 캐릭터’라며 주인공 AI가 돼 달라고 한다. ‘인터넷, 가십, 스마트폰 따위는 내 세상이랑 너무 멀다, 다른 시대를 찾고 싶다, 선생님도 그런 생각을 하실 거 같았다’고 말하는 감독의 제안에, 마리아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열등감을 느끼던 전이었다면 자신을 추켜 세워주는 말에, 자신과 생각이 같은 감독의 제안에 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도리어 다른 여배우를 추천한다. 바로 시그리드 역을 맡은 할리우드 문제아 조엔이다.

조엔은 그녀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그녀에게 자꾸만 씁쓸함을 안겨주던 존재였다. 남 시선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며 온갖 가십거리를 몰고 다니던 그녀에 의해 마리아는 주변으로 밀려났었다. 리허설 전 감독과 조엔, 마리아가 만나는 자리에서 조엔의 스캔들이 터진다. 셋의 식사자리는 조엔이 파파라치를 달고 들어오면서 순식간에 파탄 나고, 조엔과 감독은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바쁘게 전화를 하고 몸을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감독은 마리아에게 자리를 옮겨도 괜찮냐 묻고, 마리아는 어벙벙하게 그러자고 대답한다. 기자들을 따돌리는 과정에서 마리아는 뒤처지고 수동적이며 화면 가장자리에 머무른다. 연극 리허설 장면에서도 그녀는 하나의 사무실 배경으로 자리할 뿐, 리허설 장면은 조엔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카메라 역시 연신 조엔의 동선을 따른다. 영화 후반부에선 주변으로 밀려난 마리아의 모습이 계속 등장한다. 그러나 그녀는 전과는 달리 그것에 반기를 들지 않고 주변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간다. 그 표정은 평온하다. 서운함과 헛헛함이 뒤덮은 표정이 아니다. 그녀는 주인공이 되지 못함을 받아들였는가? 아니다, 동요하지 않고 자신만의 중심을 챙기는 법을 익힌 것이다.

주인공은 나
무대의 막이 오르기 직전, 마리아는 조엔을 불러 세워 연기 조언을 한다. “그 장면에서 잠깐 멈춰줘, 그래야 헬레나의 절망이 더 잘 드러날 거야, 난 그렇게 했어.”라는 식이다. 거기에 조엔은 당돌하게 “그 장면에서 헬레나가 불행한 건 너무 당연해서 중요한 게 아니다, 그 방법은 틀린 것 같다”라고 말한다. 영화 후반부에서 마리아가 한 번 더 비참해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녀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는다.

“내가 과거에서 못 벗어나고 있었나 봐”

이로써 그녀는 완전히 젊음에 대한 시기와 열등감을 털어낸다. 그리고 편안한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담뱃불을 붙인다. 막이 오른다.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난다. 그녀의 연극 위치는 중앙이 아닌 가장자리이다. 가장자리에 있지만, 카메라는 그녀를 화면 중앙에 놓고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조명한다. 누가 뭐래도, 연극에서 주연은 아닐지라도, 그녀는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삶을 살고 있음을, 그녀가 주인공인 무대는, 삶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전해준다.

연극과 삶
실스 마리아에서 대사 연습을 하던 부분은 보다 보면 젊은 세대 발렌틴과 기성세대 마리아의 실제 대화 같기도 하다. 연기와 삶을 넘나드는 연출 덕분에 관객들은 연극을 삶의 은유로 읽게 된다. 산다는 것은 자기에게 할당된 배역을 받아들이고 그에 맞춰하는 연기 일 수도 있겠다. 감독 역시 그를 의도하고 영화를 구성했다. 하지만 한 편의 연극과 인생이 다른 점은 연극에는 단 한 명의 주인공만 있다면, 인생에서는 누구나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이라는 러닝 타임이 흘러가면서, 조연의 자리로 밀린 것 같을 때, 아이를 키우며 내 삶의 중심에 더 이상 내가 있지 않을 때, 그런 순간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시 나를 중심에 놓을 수 있을까? 마리아가 혼란의 상태와 관조의 상태를 거치는 것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그 답을 말해주는 듯하다.

반복하며 살겠지
돌아서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사건의 한가운데서는 관조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 사건이 조금 비켜간 이후, 연륜을 무기로 우리는 관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딘가 한편으로 비켜서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분명 살고 있는데 삶을 살고 있지 않는 것 같은 때,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젊은 날의 치기와 열정을 부러워하면서, 생각이 많아지기도 한다. 생각이 많아지면 우리는 다시 사건의 한가운데다. 관조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진창 가운데로 뛰어들게 된다. 그렇게 뛰어들고 나면 다시 한번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전에 비켜서 있던 자리를 벗어나 새로운 관중의 자리로 앉게 된다. 성장과 이사를 반복하며 우리는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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