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한데일리=고경은 시민기자> 인간이 소비의 객체로 몰린 건 언제부터였을까?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따라, 자급자족하던 농경사회를 벗어나 도시에서 노동을 사고팔던 때부터 아닐까. 인간은 도시 생활 속에서 많은 부분 삶의 주체성을 잃고 살아간다. 하고 싶은 일을 직접 하는 게 아니라 ‘고용’되어서 하고, 잘리지 않기 위해 남 눈치를 보며 살아간다. 먹고 쓰는 것 역시 직접 구하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르는 물건을 사 와 자신의 삶을 채운다. 소비에서도 생산에서도 개인은 전적인 통제권을 갖지 못한다. 도시사회 속 인간은 점차 소외된다. 현대인의 피로함과 불안은 잃어버린 주체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이런 현대인의 고통에 ‘자신만의 작은 숲’을 가질 것을 처방한 영화가 있다.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이다.

주인공 혜원은 서울에서 임용을 준비하던 고시생이다. 아등바등 살던 서울 생활에 지칠 무렵, 본인은 떨어지고 남자친구만 합격하는 상황까지 겪은 그녀는 시골 고향 집으로 '도망치듯' 돌아온다. 고향엔 그녀의 친구들이 있다. 혜원보다 먼저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농부로 정착한 재하, 졸업 후 바로 취업해서 고향을 떠나본 적 없는 은숙. 그들과 어울리며 혜원은 직접 키운 농작물로 매끼를 만들어 먹는 즐거움에 빠진다.

왜 돌아왔냐는 주변의 물음에는 '배고파서'라 답한다. 군내 나는 편의점 도시락과 과자 같은 것들로 끼니를 때워온 그녀에게, 도시에서의 생활은 밥을 먹어도 허기진 순간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시골집으로 돌아와서 농작물을 채취하고 요리할 때 영화는 화면 가득 그녀의 ‘손짓’을 담아낸다.

요즘 시장엔 이미 번듯한 완성품이 많지만, DIY(가정용품의 제작·수리·장식을 직접 하는 것. do it yourself의 약어) 상품과 수공예 강좌가 유행이다. 자신의 손과 마음으로 물건을 만드는 몰입의 시간이 우리에게 전 과정을 통제하고 있다는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피로한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본연의 주체성을 살리려고 노력한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이런 주체성 쟁취의 노력을 귀농과 요리의 모습으로 형상화해 내고 있는 것이다.

집에 내려온 혜원이 가장 먼저 한 것은 눈 덮인 밭에서 직접 눈을 걷어 내고 배추를 뽑는 것이다. 그때부터 관객들은 차가운 눈에 닿는 손의 감각을 떠올리며 혜원의 손에 자신의 감각을 투영하기 시작한다. 임순례 감독이 특별히 신경 쓴 '계절을 통한 오감의 충족'을 맘껏 누릴 준비가 된 것이다. 겨울 추위에 혜원의 코는 빨개지고, 바람 소리는 부지런히 창틀을 때리고, 그녀가 갓 만든 음식에선 김이 모락모락 난다. 여름철 한가득 땀 흘린 혜원이 샤워 후 해 먹는 오이 콩국수에는 얼음이 동동 떠 있고 아삭거리는 오이 소리 뒤로는 매미가 맹렬하게 울어댄다. 봄에는 꽃, 가을에는 밤, 갖가지 제철 재료를 요리하는 장면은 우리에게 도시 생활로 잊고 있던 감각들을 상기시켜준다. 그렇게 세끼 차리고 치우다 보면 하루가 가는 단순하고 충만한 삶이 겨울, 봄, 여름, 가을, 다시 겨울에 걸쳐 펼쳐진다. 관객은 주인공들의 손길을 오감으로 느끼며 뺏겼던 주체적 감각을 간접적으로나마 되찾는다.

그러나 가을이 깊어 가고 바쁘게 한 해 작물을 거둬들이던 혜원에게 친구 재하는 결정적인 한 마디를 날린다.

‘그렇게 바쁘게 산다고 문제가 해결돼?’

재하 역시 바쁜 회사 생활을 하며 뭘 위해 사는지도 모른 채 살다 도시 생활을 청산한 인물이다. 바쁘게만 지내며 정말로 내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는다면, 혜원의 귀농은 재하의 예전 도시 생활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걸 꼬집어주고 있는 것이다.

‘힐링’을 앞세운 도피 권장 영화가 될 수도 있었는데 재하의 일침으로 영화는 이상향으로 치우쳐 있던 어깨를 추켜올려 균형을 맞춘다. 모든 것을 미뤄둔 채 취하는 긴 휴식은 도피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마음만 쓰면 되는 단순한 삶, 행복회로를 돌리며 영화를 따라가던 관객들은 현실감각을 갖추게 된다. 재하의 물음을 들은 혜원도 차일피일 미루다 어느새 일 년을 채운 농촌 생활을 정리한다. 잃었던 주체성을 살피는 것에 치중하여 직면한 현실의 문제를 잊어선 안 될 것이었다. 혜원에게 그것이 선생님이 되는 것인지, 서울 생활을 잘 마무리 하는 것인지, 영화가 분명하게 보여주지는 않지만 지난 시간의 허기를 채우고 서울로 올라간 그녀의 표정은 한결 여유롭다.

혜원의 엄마는 자신이 집을 떠나는 것을, 혜원이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하는 것을 '잘 돌아오기 위한 긴 여행'이라 표현한다. 영화 전반에서 '떠나기 위해 돌아오고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의 반복이 곧 인생이라는 암시가 깔린다. 이러한 인생 속에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주 심기(온상에서 기른 모종을 밭에 내어다 제대로 심는 일. 아주 심기된 모종은 그 뿌리가 단단히 박혀 재해에 쉽게 영향받지 않는다)'되어 단단히 자리 잡은 자신만의 뿌리라고 영화는 말한다.

혜원의 엄마는 혜원이 고향에서 뿌리를 단단하게 내리고 자라기를 기다려왔다고 말한다. 혜원에게 고향 집은 자신의 뿌리를 살찌웠던 비옥한 토양이었다. 그녀는 그곳을 ‘리틀 포레스트’라 칭한다. 그리고 이곳으로 더욱 '잘 돌아올 수 있기' 위해 또 서울로 향한다.

이렇게 도시의 삶에 지칠 때마다 우리도 떠올려야 할 것이 있다. 내 손으로 직접 삶의 기반을 다지던, 온전히 나만 생각할 수 있는 주체적 시간, 나의 뿌리가 있는 곳, 혜원의 고향 집과 같은 나만의 '작은 숲'이다.

혹자는 혜원과 재하가 도시 생활을 버리고 갈 수 있는 시골 땅과 집을 가진 사람인데 그들을 청년의 대표로 내세워 청년을 위로하는 영화를 만든 것은 기만이라 비판한다. 혹자는 귀농 판타지를 부추기는 현실성 제로의 영화라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의 시골은 잠시 자신만의 뿌리로 돌아가 상실했던 주체성을 살펴보는 공간을 상징하는 것뿐이다. 혜원의 고향 집과 재하의 과수원을 개인의 특수한 행운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다. 귀농  역시 관객들의 오감을 만족시켜 주고 주체성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배경으로써 쓰였을 뿐이다. 영화의 오락적 기능을 제하고서도, 이런 상징으로 읽어낸다면 본 작품이 가짜 힐링을 내세운 기만적인 영화라는 비난은 피할 수 있으리. 귀농도, 요리도, 농사도 아닌, 어쩌면 DIY 키트가 당신의 리틀 포레스트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 모두 도시로 떠나기와 내 뿌리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내일도 잘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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