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데일리=이병화 시민기자> 일본은 한반도와 가까우며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이다. 한국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왜구가 한반도의 해안에 빈번하게 침입했던 역사가 낯설지 않을 정도로 일본과 한국은 역사를 함께 살아왔다. 일제에 의해 점령당했던 식민지 시대와 조선의 적통이 일제에게 통치권 등을 내줄 수밖에 없었던 시기도 있었고 일본군 위안부라는 성적 피해자의 절규를 현재를 사는 한국인들은 생생하게 듣고 있다.

최근 이용수 어르신(일본군 위안부 성적 피해자)이 한국에서 위안부를 다뤘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서 위안부 성적 피해자 어르신들을 대변하려고 했던 한 시민단체의 대표를 사회에 고발했다. 이러한 일들은 일제가 우리에게 했던 행위들에 대해 반성하게 하며 폭력으로 점철됐던 일제에서 벗어난 현재와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맞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소설가 최일남의 '말이나 타령이나'에는 일제시대의 언어와 노래들이 생활에 스며들었고 나름대로 여기에 동화되어 빠르게 흘러갔던 조선인의 삶들이 잘 녹아 있다. 소설가 최일남은 이 작품에서 일제시대에서의 조선인들의 말과 노래를 통해 한 사람에게 충성하는 노래와 대화로서 존재하는 언어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는 과거와 말, 의식을 일깨운다. 이 작품에는 일제시대를 반추하게 하는 효과가 있고 더 나아가 이 작품은 일본어라는 문화를 배척하는 것이 아닌 긍정함으로써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다.

작가 최일남은 작품에서의 나와 송규민을 통해 이명과 말을 구별한다. 나는 언어가 생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모르면 몰라도 이명은 죄가 없다. 내 경우는 물론, 이명은 깨어있는 동안에만 바깥 음원과 관계없이 단속적으로 매미나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낸다고 들었으니까”(말이나 타령이나, p.228, 문학과지성사)

"말도 그래. 겉으로는 사람이 말을 만드는 것 같아도 궁극적으로는 언어가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새로운 의식을 심어 준다구“(말이나 타령이나, p.252, 문학과지성사)

그리고 말과 구별되는 노래와 노래의 충성성과 도구성이 이야기된다.

“말에는 상대가 있다. (노래는) 혼자 아무데서나 자기만의 정서에 푸근히 젖을 수 있다... 노래는 기쁠때나 슬플 때나 변치 않는 충성심으로 주인을 섬긴다”(말이나 타령이나, p.243, 문학과지성사)

작가 최일남은 작품의 나가 나눈 일제시대에서 창씨개명을 했던 송규민과의 대화를 통해 이명, 노래, 말을 구별하며 일본어와 한글을 ‘말’이라는 한 테두리에 두고 두 언어 모두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즉 일본어도 말로서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뜻을 모르는 일본어는 소설가 최일남이 말하는 ‘이명’과 같을 것이다. 뜻을 가지고 소통할 수 있는 것이 말로서 효과를 가질 수 있다.

또한 일본군 위안부 성적 피해에 대한 논의는 언어가 아닌 야만과 폭력을 넘어 말로 수렴될 수밖에 없는 숙명적 일로서 ‘나’와 송규민의 대화로 표현된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저런 역설을 봐봐. 잘못했다. 죄송하다. 이 한 마디면 될 것을 저토록 비루하게 끌다니”(말이나 타령이나, p.251, 문학과지성사)

이에 대해 송규민은 답한다.

“누가 보면 웃겠다. 두 노틀이 과거와 현재를 오락가락 헤매는 말놀이를 보고”(말이나 타령이나, p.251, 문학과지성사)

다시 나는 말한다.

“과거가 왜 나빠. 말놀이가 왜 나빠. 자네가 놀이라는 표현을 써서 그렇지. 이 둘이 곧 사람의 본색 아닌가. 좋은 미래를 위해서도 그렇고”(말이나 타령이나, p.251, 문학과지성사)

과거와 현재를 오락가락 헤매는 말놀이라는 송규민의 말로 역사는 정의되고 이는 사람의 본색이라는 나의 말은 역사적 인간이 숙명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곧 노래와 이명이 아닌 말이 역사를 이끌어가고 역사는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새로운 의식을 심어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일제시대에서 일본어가 한반도에 스며들고 일상화하는 과정을 그려내며 하나의 말로서 일본어가 갖을 수 있는 희망을 독자에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역사는 말로 기록되기 때문에 역사에 희망이 있다는 명제가 표현되고 있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성적 피해자 어르신들에 대한 일본의 사죄도 역시 말로 표현될 수밖에 없고 죄가 없는 이명이 아닌 말이 갖는 도덕성을 부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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