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데일리=고경은 시민기자> Z세대가 여고괴담을 본들, 그 안에 담긴 교실의 미묘한 풍경과 학생들이 느끼던 압박감에 공감할 수 있을까? 학교의 풍경과 학생들의 문화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른 시간에서 다른 억압을 받고 있는 다른 세대들에게 그 살풍경을 꼼꼼히 담아내는 것만으로는 영화가 큰 감흥을 주기엔 부족한 면이 있다. 그러므로 직접, 원초적으로 느끼게 해줘야 한다. 이번에 개봉한 증국상 감독의 <소년시절의 너>는 현 중국 입시제도의 폭력성과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감독의 독특한 연출력을 통해 훌륭하게 담아냈다.

엄마와 단 둘이 사는 첸니엔은 시궁창 같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대입에 목을 맨 수험생이다. 엄마는 도망 다니며 돈을 벌기에 첸니엔은 빚쟁이가 찾아오는 빈민가에서 홀로 위태로운 생활을 이어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따돌림의 표적이 되고, 그 가운데서 우연히 양아치 소년 샤오베이를 만난다. 불후한 환경 속에서 둘은 서로에 대한 호기심과 연민, 공감을 바탕으로 서로의 결핍을 채워 나간다. 서로를 의지해 무거운 세상을 견뎌가던 두 청춘은 수능을 하루 앞둔 날, 우연찮은 사건에 휘말리고 안 그래도 어두웠던 영화의 분위기는 한층 더 깊은 심연을 향해 달려간다.  

영화 속 학원은 무한 경쟁사회의 축소판이라도 된다는 듯 비정하다. 학생들은 사회 속 힘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한 모습을 보여준다. 힘이 있다면 약자를 조롱하고, 없다면 약자를 외면하는. 영화는 착실하게 학교 폭력이 서로를 경쟁자로 여기도록 한 입시제도 때문에 발생했다는 프레임을 짜 나간다. 이 프레임을 서사적인 면 말고도 관객들에게 오감으로 몸소 체험케하는데, 감독의 연출력이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영화는 현재 시점을 외부 이야기로, 과거를 내부 이야기로 진행하는 액자식 구성이다. 내부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카메라는 계속해서 사각형 네모 안에 갇힌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첸니엔이 다니는 학원 정경은 육층 높이의 복도식 아파트가 네모난 광장을 사면으로 둘러싼 모습이다. 각 층에는 학업을 장려하는 글귀의 플랜카드들이 정신없이 걸려있다. 웅장한 글씨들이 건물 각층을 가로지르고 있는 모습은 치열한 사회투쟁의 장을 연상시킬 정도다. 그 안에서 다 똑같은 옷의 학생들이 바글거린다. 건물 외형이 주는 직사각의 번듯한 억압의 느낌은 고스란히 학생들의 책상에 축소되어 나타나있다. 사람이 책상에 기댈 자리 하나 주지 않고 수십 권의 문제집이 빽빽하게 쌓여있다. 비좁은 틈에서 움츠리고 고개 숙여 공부하는 아이들은 마치 투명한 벽에 갇힌 것 같다.  

학원 외관과 내부를 비춘 뒤 카메라는 두 여학생의 뒷모습을 비춘다. 한 여학생이 쌓여있는 네모난 우유 박스에서 학급 우유 박스를 꺼내 든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우유 병 하나를 꺼내 마시고는 둥근 빨대를 초조한 듯 납작하게 씹어버린다. 그녀는 입구가 아무렇게나 찢어져 있는 자신의 우유병을 다시 우유 박스 한가운데 집어넣는다. 그리고는 네모난 건물 광장으로 몸을 던진다. 네모반듯하게 나눠진 우유 박스에 유일하게 찢어져 있는 하나의 우유병이 클로즈업된다. 정사각형으로 나눠진 우유 박스는 교실이고, 들어차 있는 우유병은 학생들이다. 입구가 찢어진 우유병의 존재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여학생의 투신 이후 카메라의 이동 방향은 분주하다. 사방의 건물에서 구경하는 학생들, 첸니엔을 번갈아 조명한다. 자살을 둘러싼 추측성 채팅창의 네모난 화면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떨어진 소녀와 그 소녀에게 잠바를 덮어준 첸니엔의 모습은 촬영하던 수십 개의 휴대폰 화면 속에서 조각나고 흩어진다. 주요 인물의 대사 하나 없이 영화 초반부가 지나간다.

세상의 폭력 속에서 서로를 지키는 사랑이야기, 어쩌면 흔하다 할 수 있을 얘기를 감독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135분 동안 힘 있게 끌고 나간다. 어느 순간도 화면에서 강렬한 긴장감이 사라진 적이 없다. 다양한 구도의 대비와 진득한 클로즈업이 내내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는 주인공들 안의 응축된 에너지를 대신 방출시켜주고 있었다. 주요 인물의 대사가 아닌 화면 배치만으로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유도해낸다. 같이 본 지인은 ‘보는 내내 CF를 보는 것 같았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사회의 최하층인 두 청춘이 만나 이루는 로맨스가 비장미를 온몸에 두르고 진행된다. 시진핑 독주체제와 홍콩시위로 인한 삼엄한 검열이 판치고 있는 현시점에서 중국사회를 비판하는 영화가 중국의 대중영화로 나왔다는 점이 또한 놀랍다.

한편으론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입시제도라는 사회제도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사회제도를 완전히 파괴해버리는 선택을 한 첸니엔이라는 캐릭터의 모순성에 대단한 흥미가 간다. 이 부분이 어쩌면 영화 내 가장 큰 페이소스이지 않을까. 제도의 농락 안에서 끝없이 모순에 갇히게 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니깐 말이다. 그래서 영화는 사회제도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지속적으로 꼬집으며 말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찾아야 하는 답은 사람이라고. 사람이 구원이라고.

첸니엔에게 샤오베이가 한 말이 있다.

‘너는 세상을 지켜, 나는 너를 지킬게’

세상을 지키는 건 개인 한 사람을 지켜나가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학교 폭력에 노출됐던 첸니엔을 구한 건 샤오베이였다. 잘못된 선택으로 평생 후회할 뻔했던 샤오베이와 첸니엔을 구한 건, 그녀와 친구가 되길 바랐던 형사였다. 그리고 그들의 보호 속에서 자란 첸니엔은 교사가 된다.

한 두 명의 개인이 사회의 굴레를 벗어던지기엔, 특히나 어린 청춘이 헤쳐가기에 세상은 너무나도 무겁고 잔인하다. 샤오베이와 첸니엔이 서로만 의지하여 살던 영화 속 세상 역시 너무나도 잔혹하지 않았나. 그래서 영화는 첸니엔의 영어 수업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또 다른 메시지를 건넨다.

‘This is our playground’
‘This was our playground’
‘This used to be our playground’  

현재에도 계속되는 문제로 여길 것인가, 과거의 일을 인정할 것인가, 다 잊고 무관하다는 듯 살 것인가.

위 세 문장으로 수업을 진행하던 첸니엔은 유난히 주눅 든 한 아이를 발견한다. 어른이 된 첸니엔이 소년시절에 있는 또 다른 ‘너(나)’를 발견한 것이다. 첸니엔은 따돌림 당하는 그 아이의 하굣길을 뒤에서 조용히 따라 걷는다. 예전 샤오베이가 그러했듯이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그녀에게 여전히 사회는 우리의 ‘플레이그라운드(playground)’인 것이다. 자살한 친구에게 손 내밀지 못했던 과거와 자신이 당했던 과거를 거쳐 그녀가 한 선택은 ‘is’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를 샤오베이가 따뜻한 시선을 한 채 따라 걷는다. 영화는 시작과 마지막에서 반복하여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 답은 정해져 있다. 과거 저편으로 묻어두지 말길, 지금 당장 손 내밀어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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